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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정읍을 가다,,,trip/korea 2026. 7. 6. 13:55
목포에서 곧 바로 정읍으로 올라 갔다,,,
왜 정읍을 거쳐 서울로 올라 갔을까?,,,
동학농민혁명이 시작 되었던 정읍 덕천면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들리기 위해서 이다,,,
언젠가 한번은 가고 싶었다, 책을 통해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조선후기의 농민항쟁을 실증된 자료를 통해 좀더 알고자 함 이였다, 객관적 인식를 얻어 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무엇이였고, 어떤 구체성을 갖으려고 했는지도 알고 싶었다,,,
동학농민혁명은,,,
132년 전인 1894년 일어난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의 거대한 민중항쟁으로서 우리나라 근대화와 민족민중항쟁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이 거대한 농민혁명은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농민봉기 항쟁 흐름 속에서, 후대에 지속적으로 이어질 역사적 사건으로 위치 되어 졌다,고 할수 있다,,, 이것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졌던, 조선 후기 사회의 폐단들 중 삼정문란(토지세 전정, 군정, 곡식대여 환정)을 개혁하기 위해 빈발 하였던, 수많은 민란의 연장선 위에서 그 종점을 찍는 거대한 민중운동이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이래 ‘아래로부터’ 표출되고 있던 민중의 변혁 의지를 계승 수용하여 체계화한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은,,,
크게 1894년 3월 21일의 1차 봉기와 1894년 9월 초순의 2차 봉기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1차 봉기와 2차 봉기 사이의 중요한 사건으로는 1894년 5월 7일의 '전주화약'과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점령한 사건'을 들 수 있다,,,
1차봉기,,,
1893년 11월의 사발통문(사건의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참가자의 명단을 둥근 형태로 적은 통문) 모의와 그 실행인 1894년 1월의 '고부(정읍)농민봉기'를 꼽을 수 있다. 이후 1894년 3월 21일 전라도 무장에서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가 발생했다,,,
'백산'대회를 통해 혁명의 대장정에 올랐고, 이후 1894년 4월7일 정읍 황토현 전투와 4월23일 장성 황룡전투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1894년 5월31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일대 쾌거를 이룬다,,,
1894년 5월 7일의 전주화약,,,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농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지원군을 요청했고, 일본도 “조선에 일이 있을 시 청과 일본은 공동 출병한다”는 ‘톈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동학 조직의 지도자) 전봉준과 경군(서울에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의 지휘자 '홍계훈'이 서둘러 맺은 것이 '전주화약' 이었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자진 철수하는 대신, 조선 민중 최초의 자치기구인 '집강소'(민초들을 위한 동학농민군의 민주적 지방통치 자치기구)를 설치하여 전라도 각 군현에 대한 농민군의 폐정개혁(탐관오리 처벌과 삼정의 폐지) 활동이 이루어졌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점령한 사건,,,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정에 간섭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군를 조선에 계속 주둔시키기 위한 명분을 찾고자, 동학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대원군에게 입헌군주제를 모델로 한 새로운 내각을 수립할 것을 강제하였다,,,
2차봉기,,,
이러한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 점령 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쟁’의 성격을 띠고, 9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가 이어졌다,,, 청일전쟁 이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를 비롯한 전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에게 크게 패배 하면서 전환점을 맞이 하였다,,,
1894년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걸쳐 공주 일대에서 발생한 전투 중 하나였던 우금치 전투는 동학군의 2차 봉기 단계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렀던 전투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기세를 크게 잃고 쇠퇴하는 기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전체 과정에서 최대의 분수령이기도 했다.
2차봉기의 시작,,,
1894년 8월 말,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항일의 기치를 내걸고 전라북도 삼례에서 재봉기를 결심한 전봉준은 대도소(농민군 총본부)를 설치하고 인근 군현을 공격하여 무기와 식량 확보에 들어갔다,,,
실제로 북상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9월 말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우선 전봉준 자신에게 병이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아직 가을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전봉준은 추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함께 봉기할 연합 세력을 모으는 데 힘썼다,,,
그는 당시 동학 교단의 최고 지도자였던 최시형에게 ‘기포’(지역단위의 큰 동학조직)에 동참하여 전국적으로 동학농민군의 세를 모아주길 청원 했으며, 각지의 동학 접주(작은 단위의 동학 지도자)들에게도 통문을 보내 함께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결과 금구, 전주, 정읍, 부안, 진안에서 4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모였다,,,
그렇게 모인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1차 공격지로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를 겨냥했다,,,
'삼례'에 모인 전봉준의 동학농민군(남접)은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인 10월12일경 북상을 개시해 논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을 재모집하는 동시에, 10월12일 부터 16일 사이에 손병희가 이끌고 있던 충청도 북동부 지역 동학농민군(북접)과도 합세했다. 이외에 최시형 휘하의 수많은 두령들이 충청도, 경상도 각지에서 '포'(기포)를 일으켜 논산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렇게,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모인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할 즈음 1만여 명의 대규모 남·북접 연합부대를 형성하였다,,,
공주와 우금치전투,,,
1894년 10월 23일,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처럼 흐르던 긴장감이 일시에 깨졌다,,,
공주 우금치 일대인 '이인'에서 공주성을 둘러싼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 전투는 3일간 전개되었고, 동학농민군 약 4만 명과 조선 정부의 최정예 부대, 그리고 최신 무기와 전술로 단련된 일본군 제2중대(1개소대와 2개분대)가 온통 뒤섞여 대접전을 벌였다,,,
동학농민군은 숫자로는 우위였지만 무기와 전술 면에서 열세였고, 초반에 상당히 호전했지만 10월 24일에 또 다른 일본군 지원대가 합류하면서 전세는 곧바로 역전되었다,,,
전봉준은 10월 25일 농민군을 후퇴시켜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동학농민군과 조선 정부군, 일본군은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우금치 일대를 중심으로 2차 격전을 벌였다. ‘우금치 전투’로 알려진 전투는 바로 이때 벌어진 전투였다,,,
11월 8일, 동학농민군은 3진으로 나뉜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맹공을 가해 공주 감영으로 몰아붙였다,,,
11월 9일, 승리의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우금치 일대의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 진지를 향해 총공격을 가했다,,,
우금치와 견준봉 사이의 작은 산등성이를 방패 삼아 농민군을 내려다볼 수 있던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이 다가오면 일제히 사격을 하고 몸을 숨겼다가, 또다시 능선을 넘는 농민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기를 되풀이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깃발을 흔들고 북을 울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오는’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본 관군은 "저들은 그 어떠한 의리이며 그 어떠한 담략인가. 그들의 행동을 말하려 하고 생각함에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하다"라며 그 불굴의 기세를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이날, 40~50차례의 일방적인 사격이 있었다. 농민군의 시체 더미가 온 산에 가득했다,,,
2000년대 초반 우금치 일대에서 녹취한 구술 자료에 따르면, 동학농민군과 진압군의 격전지였던 삿갓재와 승주골에서는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흙만 덮었다고, 그 일대는 전부 무덤이었다고, 주민들이 동원되어 3년에 걸쳐 농민군 시신을 치웠다고 한다,,,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 중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1·2차의 격전을 치르고 생존한 농민군은 5백여 명에 불과했다,,,
동학농민군 전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전봉준 부대는 우금치 전투를 계기로 급격히 쇠퇴했다. 농민군은 더 이상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한 채 와해되었고, 이후 지역별 항쟁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1894년 11월25일 정읍(고부) 태인현 전투에서 전봉준은 5,000명의 농민군과 전력을 다했지만 패한 후, 더는 농민군을 규합하지 않았고, 후일을 위해 정읍 피노리로 대피 하였다,,,
12월2일 전봉준은 밀고로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 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영사관에 수감된 채 고문을 당하다 교수형에 당해 졌다,,,
소설 녹두장군의 마지막 구절,,,
그들은 이름도 내세우지 않고 싸웠던 까닭에 대부분 이름도 남아 있지 않고, 이름이 없으니 묏등이나 비석도 있을 리 없다. 싸우다 산과 들에서 죽고 논밭에서 썩어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정읍 덕천면,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주차장에는 차 몇대와 단체로 견학을 온 학생들 버스가 보였다,,,
기념관 까지는 제법 걸어 갔고,
직원들이 햇볕을 받으며 시설물들을 수리하고 있었다,,,










19세기 조선 농민의 저항,,,
농민봉기는 1862년 철종 때 특히 많았다고 한다,,,
이때까지의 봉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고을에 수령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함,,,

조선 후기 농민봉기의 주된 원인은 '삼정'의 문란 이였다고 한다,,,
삼정은 '전정'(토지세), '군정'(군역), '환정'(곡식대여)을 말한다,,,

농민봉기는 삼남지역(충청,전라,경상)으로 퍼졌고,
일본의 징발이 심해지면서 봉기는 더욱 확산 되었다고 함,,,

사발통문,,,
참가자들의 이름을, 사발그릇을 엎어 놓은것 처럼 둥근 원 모양으로 빙둘러 서명함으로써 누가 주동자인지 알 수 없게 만들고 함이고, 이것은 탄압을 피하고 모든 참여자가 평등하고 동등하게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문서 양식이다,,,
1893년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정부패에 항거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적인 시작점으로 평가 된다고 함,,,

농민봉기가 동학농민혁명으로,,,
농민봉기는 '삼정'(토지,군정,곡물대여)의 폐단과 관리들의 수탈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에 그쳤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그 한계를 넘어선 대규모 농민항쟁으로 이여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학은 대중 지향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농민에 깊이 영향을 미쳤고, 1890년대 초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지빙을 중심으로 전국조직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 동학사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조직적 토대가 되었다고 함,,,
한편, 전라도 동학교단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변혁지향적인 인물들이 동학농민군들을 이끌면서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이들은 사회개혁을 실현하기위해 동학을 종교에 국한 시키지 않고 사회변혁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래사진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붙잡히고 학살 당한 경위와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다,,,
전봉준은 우금치 전투후,
1894년 11월25일 정읍(고부) 태인현 전투에서 5,000명의 농민군과 전력을 다했지만 패한 후, 더는 농민군을 규합하지 않았다,,,그리고 후일을 위해 태인에서 동학농민군을 해산 하고, 몇일간 정읍 대흥리 '차지구'의 집에 숨어 지냈다,..
11월29일 장성과 정읍에 경계에 있는 '입안산성'에서 관리자 이종록의 도움으로 하루밤을 묶음 뒤, 순창 피노리로 들어갔다,,,
피노리 인근 종성리에는 다른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이 있었고, 그를 만나 동학농민군을 다시 규합할 계획으로 일행과 함께 순창 피노리로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피노리에는 동학 고부지역 접주(조직책임자)로 활동할때 접사로 있었던 '김경천'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믿을 만한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이곳 피노리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이 되었다,,,
12월2일 피노리에서 밀고로 관군에 붙잡힌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넘겨져 1895년 1월 서울로 압송 되었고,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된 채 다섯 차례의 심문을 받은 뒤 1895년 4월30일(양력4월24일) 교수형을 당했다,,,
김개남도 관군에 붙잡혔다,,,
전라관찰사에게 심문을 당했고, 그 기개가 너무 당당하여 서울로 압송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바로 효수을 당했다,,, '효수'는 목을 베어 장대 위에 높이 메달아 대중에게 공개하던 조선시대의 극형,,, 이후 김개남의 '수급'은 서울로 옮겨져 3일간 '효시'되었고, 다시 전주에서 효시 되었다고 한다,,,
손화중은 전봉준과 김개남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이봉우에게 "네가 나를 고발하여 후한 상을 받아라, 그동안 네게 진 빛을 갚겠다" 고 하였다, 붙잡힌 후에는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과 함께 같은날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최경선은 부대을 해산하고 동북에 있다가 부하 220명과 함께 관군에 체포 되었다가 일본군에 인계후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과 함께 처형 되었고 함께 있던 동학농민군 157명은 관군에게 총살 당했고, 나머지 63명도 투옥후 학살 당했다고 한,,,

일본군에 의해 1895년 1월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4월30일 새벽에 순국,,,
종로사거리에 녹두장군 전봉준에 마지막 모습 동상이 세워져 있고,,,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후,
동학농민군에 최후의 항쟁들,,, 두드러진 곳은 장흥과 강진 이었다,,,
12월4일 수만 명의 농민군은 벽사역을 점령 했고,
12월5일 장흥부를 점령 했고,
12월6일 강진현를 함락 했고,
12월10일 강진 병영을 공격 했다고 한다,,,
12월12일 농민군과 관군이 전투를 했고,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남산으로 퇴각,
15일에는 일본군이 합류 했고, 장흥 석대들에서 농민군은 수백명이 희생이 되었고 다시 자울재로 퇴각,
12월17일 장흥 옥산들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으나, 열악한 무기로 1백여명이 희생 되었다,,,,

장흥 석대들과 옥산들 전투를 끝으로 장흥과 강진 지역 동학농민군도 해산,,,
전라도로 후퇴한 농민군과 고산, 진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은 대둔산 정상 부근에서 초막 3개동을 구축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치 하였다,,,
3개월을 버텄으나 1895년 1월24일 소년1명을 제외하곤 25명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 했다고 한다,,,

평등사회 구현,,,
동학농민혁명은 수십만 명이 직접 전투에 참여 하였고, 그 중심세력은 경제적 신분적으로 약자층 이였다,,,
이것은, 구조적 모순을 지닌 조선사회의 경제적 계급적 평등을 구현 하려는 것이였다,,,

동학농민혁명의 현대적 의의,,,
첫째, 한국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민중이 역사발전의 주체로 첫 등장하였다,,,
이전에도 수많은 민란이 있었으나 목표나 조직이 없었다, 그렇지만, 동학농민군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집강소를 통해 농민자치를 실현한 것은 역사발전의 주체적인 역할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둘째, 조선후기 이후 전개되어온 사회개혁을 지향하였다,,,
대원군 정권은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유생과 민비의 공격으로 실각 하였고, 이후 등장한 민비세력은 정치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군은 낡은 구질서를 배격하고 신질서 사회구조를 지향 했던 것이다,,,
셋째,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반침략 반외세'를 분명히 했다,
농민군은 외세와 가장 첨예하게 대랍하였다,,,
넷째, '아래로 부터의 개혁'을 추진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근대사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 지어 주었다,,,
다섯째,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실패 하였지만, 한국사회의 민족민중항쟁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현대에 전개된 419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10 민주화운동, 역시 동학농민혁명에서 그 뿌리를 찾을수 있다,,,

농민군이 바라던 세상,,,
경제적 요구는, 조세 수취제도인 삼정을 바로 잡는데 있었다,,,
삼정개혁은 갑오개혁에 상당 부분 수용되었고,,, 상업활동의 개선 요구는 관이 특정물건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는 도고의 철폐, 영세상인에 대한 지배층의 수탈금지, 농촌 영세한 행상들의 활동보장, 외국상인들의 개항장 밖 활동금지및 상권확대 억제 등을 요구 하였다,,,
사회개혁은, 신분제 폐지에 집중 되었다,,,
횡포한 양반과 수령을 비룻한 관속, 양반 지주에 대한 처벌을 단행 하였다,, 또한 동학농민군 사이에는 신분의 벽을 없애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었고, 이러한 활동은 집강소 기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치개혁은, 민씨세력의 축출과 탐관오리 제거 였다,,,
이것만으로는 동학농민군의 정치적 지향이 드러났다고 볼수 없었고, 1년간의 짧은 동학농민혁명 이였지만, 정치적 구상은 단계별로 변화 발전하였다,,,
그 정치적 지향점은
'군민공치'의 정치형태를 꿈꾸는 것과, 외세축출에 중점을 가졌다,,,
전봉준은 임금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절대권력은 인정하지 않았다,,, 즉, 군민공치의 정치형태, 동학농민군이 참여하는 입헌군주제를 꿈꾸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전에 서양 선교사와 일본상인에 대한 반감과 축출이, 일본군의 조선진주와 경복궁 강제 점령과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내정간섭을 하자, 일본을 대상으로 반외세 항쟁을 전개 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나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없어서 일까,,, 들어가니, 젊은 직원이 우릴 반겨준다,,,

입구에 있는 조형물,,,


짧은 영상을 보여준다,,,

농민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쯤에 전봉준 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집강소,,,
한국역사 최초이자 마지막 민중지방자치기구

동학농민혁명의 1.2차 봉기를 지도로 표시해 놓았다,,


청일전쟁,,,

동학농민혁명으로 부터 나온 한국민중운동의 흐름들을
짧은 슬라이드 영상으로 보여준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익산 선배에게 들렸다,,,
좋아하는 잎새주 소주를 드렸고,
못다이룬 농민해방세상을 그 곳에서는 잘 이루어 내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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